요즘 회의에서 “기획”이라는 말이 너무 막 쓰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무언가를 발전시킨 행위는 모두 “기획을 했다”고 표현되고, 그래서 정작 “기획 역량을 키우자”고 하면서도 그 본질은 한 번도 정의된 적이 없는 채 굴러간다.
이 글은 그 회의들에서 우리가 잠정적으로 도달한 결론을 정리한 것이다.
정답이 없는 영역
기획에 객관적 수행 지표가 있는가. 달리기는 기록이 있고 수학에는 정답이 있다. 그런데 기획은 없다. 일론 머스크도, 스티브 잡스도, 자기 기획에 만점을 줄 수는 없다. 사회학과 철학이 비슷한 영역에 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기획을 잘한다”는 표현부터가 어색하다. 우리가 평가하고 있다고 믿는 그 무엇은, 사실 정확히 무엇인가.
곱셈 공식
여러 차례 격론을 거치면서 우리 팀이 얻은 잠정 결론은 한 줄짜리 공식이다.
기획 퀄리티 = 도메인 지식 × 기획 역량
두 변수는 곱셈 관계의 독립 변수다. 하나만 강하면 결과물은 약하다. 도메인 지식이 깊어도 기획 역량이 없으면 의미 있는 산출물이 안 나오고, 기획 감각이 좋아도 도메인을 모르면 헛짚는다.
별 것 아닌 정리처럼 보이지만 합의가 쉽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기획 역량 안에 도메인 지식이 들어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기획만으로는 부족하고 마케팅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결국 도메인과 기획을 분리해서 곱하는 모델이 모두에게 수긍됐다.
분리해야 했던 이유는 이렇다. 다른 도메인으로 넘어가도 통하는 일반 기획 능력이 분명히 있다. 동일한 도메인 수준의 두 사람을 비교했을 때, 그 안에서도 기획을 더 잘 짜는 사람은 따로 있다. 두 변수는 독립적으로 평가하고 독립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신입에게 이 모델이 의미하는 것
분리해서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도메인 지식이 적은 신입에게도 기획 역량 훈련은 의미가 있다는 것. 두 변수가 독립이니까, 도메인이 차오르는 동안 기획 감각은 병렬로 길러질 수 있다.
반대로, 도메인 지식만 쌓인 시니어가 결과물이 약한 것도 같은 이유다. 시간이 만들어준 적분값에는 한계가 있다. 거기에 곱해질 다른 변수가 비어 있으면, 곱은 여전히 작다.
그래서 신입을 “도메인이 부족하니 단순한 일만”이라는 식으로 미루는 건 손해다. 곱의 한 축을 일찍부터 키워두는 게 길게 보면 더 빠르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
그럼 기획 역량이 정확히 뭔가.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문제가 있음을 의식하는 능력”이다. 워크플로 어딘가에 페인포인트가 있고, 그것이 문제임을 인식하는 일. 이게 1단계다.
다음 단계는 룰이 바뀐 상황에서 워크플로 자체를 다시 짜는 것이다. 1단계가 개선이라면 2단계는 재설계다. 둘은 요구되는 역량이 다르다. 1단계는 관찰과 디테일의 영역이고, 2단계는 추상화와 베팅의 영역이다.
이렇게 단계를 분리해 두면, 적어도 누군가를 평가할 때 더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기획 잘하나?”라는 추상적 평가가 아니라, “이 사람이 1단계는 가능한데 2단계는 어디서 막히는가?” 같은.
학습 가능한가
본질을 다 정의하지 못해도 학습은 가능하다. 동료 한 명이 한 표현이 정확하다 — “기획에서 잘못된 무언가를 반복하는 것”이 곧 훈련이다. 본질을 알아야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시행착오가 의미 있게 누적되려면, 같은 팀 안에서 각자가 어떻게 기획 역량을 키워왔는지를 서로 공유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정답이 없는 영역에서 사람들이 사적으로 발견한 작은 룰들을 모아야 무언가 굳어진다. 한 사람이 십 년에 걸쳐 발견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일 년 안에 흡수할 수 있게 하는 게 조직의 역할이다.
마무리
“기획을 잘한다”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곱셈 공식과 단계 정의로 정리해본 글이다. 결국 평가도 두 변수로 따로, 육성도 두 변수로 따로. 그것만으로도 신입에게 어떤 일을 맡길지, 시니어가 왜 정체되었는지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다음 글에서는 이 모델을 4개 축으로 확장한 평가 프레임을 정리해보려고 한다.